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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130년을 걸아가다( 경주에서 만난 신라의 꿈과 현실)

 

토함산으로 향하는 길

 

토함사로 올라가는길 (이해를 돕기위한 이미비사진)

 

구불구불한 산길과 논밭 사이로 보이는 고분들 경주시내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구불구불했어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논밭 사이로 보이는 작은 고분들, 여전히 발굴 중인 유적지들을 보며 '여기가 정말 천년 고도구나' 하는 실감이 났죠.

토함산 자락에 들어서자마자 공기부터 달라졌어요. 도심의 소란함이 점점 멀어지고, 대신 짙은 녹음과 새소리가 차를 감쌌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가는 길, 벌써부터 설렘과 묘한 긴장감이 교차했어요.


첫 발걸음, 그리고 첫인상

불국사의 웅장한 일주문

 

불국사의 웅장한 일주문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는 순간, 잠시 걸음을 멈췄어요. 수학여행 때 왔던 기억과는 완전히 달랐죠. 어른이 되어 다시 보는 불국사는 그때보다 훨씬 더 깊고 무거운 느낌이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일주문. "불국사"라고 쓰인 현판을 보며 생각했어요. 751년, 김대성이라는 한 사람의 꿈으로 시작된 이곳.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 돌 한 돌 쌓아 올린 신라인들의 염원이 여전히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구나, 하고요.


천년의 계단, 청운교와 백운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청운교와 백운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청운교와 백운교 계단 드디어 마주한 청운교와 백운교. 사진으로만 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웅장함이었어요. 아래쪽의 청운교 17계단, 위쪽의 백운교 16계단. 총 33계단이 상징하는 것은 불교의 33천이라고 합니다.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어요. 이 계단을 밟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13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을 올랐을까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절망하는 마음으로, 또 때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요.

각 계단의 돌 표면은 세월의 흔적으로 매끄러워져 있었어요. 무수한 발걸음이 만든 자연스러운 곡선.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역사구나 싶었습니다.


불국사 기본 정보

  • 창건: 751년 (신라 경덕왕 10년)
  • 창건자: 김대성
  • 완성: 774년 (혜공왕 10년)
  • 세계문화유산 지정: 1995년
  • 주요 문화재: 다보탑(국보), 석가탑(국보), 청운교·백운교(국보), 연화교·칠보교(국보)
  • 면적: 약 3만 3천 평
  • 관람시간: 오전 7시 ~ 오후 6시 (계절별 차이 있음)

김대성, 한 사람의 꿈이 만든 기적

불국사를 이해하려면 김대성이라는 인물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당시 신라의 재상이었지만, 단순히 권력자가 아니었어요.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죠.

23년이라는 긴 세월. 요즘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얼마나 긴 시간인가요? 하나의 프로젝트를 23년간 지속한다는 것. 그것도 개인의 신념과 의지로. 김대성의 이런 뚝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불국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보탑 - 화려함 속의 깊은 뜻

 

섬세하고 화려한 다보탑

 

섬세하고 화려한 다보탑의 모습 대웅전 앞마당에 서니 드디어 그 유명한 두 탑이 눈에 들어왔어요. 먼저 다보탑. 10원짜리 동전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실물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습니다.

다보탑 앞에 서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어요. 1400년 전 사람들이 만든 것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전쟁도, 세월도, 무수한 변화도 이것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요.

높이 10.4미터, 신라 석탑 중에서도 독특한 구조를 가진 다보탑.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롭고 안정감이 있었어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더욱 흥미로웠어요. 탑의 각 부분마다 의미가 있고, 전체적으로는 불교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단순히 예쁜 탑이 아니라 신라인들의 철학과 신앙이 돌로 구현된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석가탑 - 완벽한 단순함의 미학

 

불국사 삼층석탑

단순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의 석가탑 다보탑과 대조적인 석가탑. 정식 명칭은 '불국사 삼층석탑'이지만 모든 사람이 석가탑이라고 부르죠. 왜 그럴까요? 답은 간단했어요. 석가여래를 상징하는 탑이기 때문입니다.

석가탑은 단순하고 완벽했어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깔끔함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울림을 느꼈죠. 높이 8.2미터, 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복잡한 마음으로 왔던 제가 이상하게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석가탑의 단순함이 주는 힘일까요? 아니면 1300년을 버텨온 돌의 무게감 때문일까요?

1966년 해체 복원 과정에서 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이라고 합니다. 8세기에 만들어진 경전이 20세기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 이것 또한 하나의 기적이 아닐까요?


대웅전과 극락전 - 신라 건축의 정수

 

불국사 대웅전과 극락전

  불국사 대웅전과 극락전, 그리고 연화교 칠보교 두 탑 뒤편의 대웅전.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 재건된 것이지만, 그 자리는 창건 당시부터 변하지 않았다고 해요. 130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죠.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님을 보며 마음이 차분해졌어요. 아마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극락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어요. 청운교, 백운교와 비슷한 구조지만 조금 더 화려한 느낌이었죠. 극락정토로 향하는 길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아픈 역사, 그리고 재생

1593년, 임진왜란. 불국사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어요. 23년에 걸쳐 쌓은 김대성의 꿈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것이죠.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그 당시 이곳을 지키려 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하지만 불국사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1604년부터 시작된 복원 작업.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끊임없이 보수하고 지켜온 사람들의 노력.

현재 우리가 보는 불국사는 원래 모습 그대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어요. 끝없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면, 불국사는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절마다 다른 불국사

 

불국사의 사계절(가을)

 단풍으로 물든 가을 불국사의 모습 봄에는 벚꽃과 함께,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함께, 가을에는 단풍과 함께, 겨울에는 설경과 함께. 불국사는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요.

제가 방문한 것은 초여름이었는데, 신록이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석가탑과 다보탑 주변의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인상적이었어요. 자연과 인공물이 이렇게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구나 싶었죠.

가이드는 말했어요. "가을 단풍 시즌에 다시 오세요. 완전히 다른 불국사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그럴 것 같았어요. 같은 공간이지만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리고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불국사인 것 같습니다.


추천 포토존과 관람 팁

불국사 입구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백운교 전경 꼭 찍어야 할 사진:

  • 청운교·백운교 전체 모습 (입구에서)
  • 석가탑다보탑이 함께 나오는 앵글 (대웅전 앞에서)
  • 극락전에서 내려다본 전경
  • 일주문과 함께 찍는 인증샷

관람 팁:

  • 오전 일찍 가면 사람이 적어서 사진 찍기 좋아요.
  • 가이드 투어를 들으면 훨씬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편한 신발 필수 (계단이 많아요).
  • 석굴암과 함께 코스로 묶어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떠나며 드는 생각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김대성이 남긴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을까요?

2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나의 목표에 바친 그의 의지력을 생각하면서, 저는 과연 무엇을 위해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았습니다.

불국사를 나서며 마음속에 남은 것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어요. 인간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경외감이었고,

동시에 저 자신에게 던지는 조용한 질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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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신 선생은 임신 중인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아이를 낳은 지 12일 만에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그 아이는 시력을 잃었고........,

안경신 선생은 출소한 후 그 행방이 알려진 바가 없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을 추서했으나, 후손이나 가족이 없어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안경신 선생은

안경신 선생은 1888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본명은 안영실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를 2년 다니셨으나 중퇴하셨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군중을 선동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29일간 구류되셨습니다.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그 이후 선생께서는 오신도와 안정석과 함께 1919년 11월에 평양에서 여성 독립단체인 대한 애국 부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대한 애국 부인회는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각 지부에서 만세운동, 투탄, 암살 등의 공격 활동을 펼쳐 일제의 통치를 저항하였습니다. 안경신 선생은 본부의 교통부원이었으며, 강서지회의 재무도 담당하였습니다.

상하이로 건너간 안경신 선생

안경신 선생은 임시정부의 비밀 요원이었던 김행일과 함께 1920년 상해로 건너가셨습니다.

그 해 미국 의원단이 한국에 오자,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 광복군 총영에 가입하셨습니다. 총영은 일제의 통치기관과 우두머리들을 폭탄과 암살로 공격하는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폭탄을 던지다

안경신 선생은 임신 5개월 된 상태에서도 총영의 동지들과 함께 평안남도 안주에서 경찰 1명을 쏘아 죽이고,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에 참여하셨습니다.

이때 그녀는 폭탄을 들고 달리다가 넘어져서 부상을 입었으나,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셨습니다.

“나는 3․1만 세 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곧 폭탄을 던지거나 칼로 찔러 죽이거나 총으로 사살하는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요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이는 102년 전인 1920년 8월 3일에 하신 말씀입니다

 

 

안경신이 체포된 것은 도피생활 7개월째인 이듬해 1921년 3월 20일. 피신처에서 아기를 낳은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품에는 태어난 지 12일 정도 된 핏덩이가 안겨 있었다. (…)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남자현 의사처럼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이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폭탄 투척 거사와 같은, 남성의 열사들도 함부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에 나선 여성 투사는 안경신이 유일하다. 거사 직후 언론은 그를 두고 '여자 폭탄 법'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의 동지 최매지는 이렇게 증언했다.

 

"독립투쟁가가 많이 있고 여성 투쟁가도 수없이 있다. 그러나 안경신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멸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 - <조선의 딸, 총을 들다>에서.

1920년 8월 당시, 미국 상하 의원단 100여 명이 동양 시찰차 중국에 들러 일본으로 가는 길에 조선(한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정보를 입수한 대한 광복군 총영은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총영 소속 10여 명의 청년들로 결사대를 꾸려 서울과 평양, 신의주의 경찰서 등을 폭파하는 거 사를 계획한다.

 

33세의 안경신은 유일한 여성 대원이었다. 게다가 임신한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안경신이 속한 제2 대 2조의 평양 경찰서 폭파는 폭탄의 불발로 실패하고 만다. 이에 다른 대원들은 황해도로 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를 시도한다. 그러나 안경신은 임신한 몸이라 동행하지 못하고 혼자 남아 폭파 기회를 노리다가 한층 강화된 감시와 경비로 뜻이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출산한 지 보름도 되지 않은 몸으로 체포되고 만 것이다. 도피 7개월째였다.

 

안경신 선생의 이야기는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출생 직후 감옥에서 함께 지낸 아들은 감옥에서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해 시각장애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출옥 후 안경신 선생의 행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핏덩이를 안고 형무소로 끌려간 그가 출옥한 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그의 남편이나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은 또 어떻게 되었는지 등,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은 1962년 건국 공로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나 선생의 친지나 가족 등이 없어 아직까지 전달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지만 현실에서는 당대의 대가 끊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 다만 국민에게 나라를 남겼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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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이화림 선생 활약상 요약

이화림 여사는 일제가 조선을 본격적으로 잠식해 나가던 1906년, 평양의 가난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꿈마저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생의 오빠인 이춘성, 이춘식 선생은 독립운동가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평양 3.1운동에 가담하였으며, 25살에 중국 상하이로 넘어간 그녀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 그곳에서 사격과 무술을 배운 후 일본 밀정을 유인해 살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화림 선생은

선생은 1906년 평양의 가난한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으나 가난은 그의 꿈마저 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선생은 그와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3.1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투쟁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어느 한 남자가 질문하고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라고 선생은 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어느 한 남자는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이 문답은 김구 선생과 이화림 여사가 처음 만나 나눈 대화로 알려져 있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행사가 열리는 이곳에 말쑥한 스프링코트를 입고 도시락과 물 통을 든 한 남자가 들어섰다. 바로 윤봉길 선생이었다. 윤봉길 선생은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일본 거류민 단장을 즉사시키고, 노무라 중장의 두 눈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우에다 중장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외에도 몇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한 '상하이 점령 축하식'이 열리던 전날, 윤봉길과 이화림은 부부로 가장하고 기념식이 열렸던 훙커우 공원을 미리 답사했다.

 

실제 거사 날 1백 m쯤 뒤에서, 양장 차림의 젊은 여인이 윤봉길 선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은 윤봉길 선생이 공원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사라졌다.

앞서 몇 달 전, 일본에서 미완의 거사(1932년 1월 8일)로 끝난 이봉창 의사를 도운 것도 이 여인이었다. 이 여인이 바로 독립운동가 이화림 선생이다.<이화림의 회고록 중에서>

 

이화림 선생의 광복 후 활동

1945년 1월 이화림은 김무정의 권유로 옌안 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946년 11월 21일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졸업 뒤에는 하얼빈에서 의사로 활동하였고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서 소장으로 중공군이 되어 참전하였습니다.

1955년 중국으로 돌아가 심양의 소학교 부교장, 중국 교통부 위생 기술과 간부를 지냈으며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당시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었습니다.

1984년 은퇴하였고 1987년 대련시 조선족 노인 협회의 명예 회장을 지냈습니다.

1999년 2월 10일 전 재산을 대련시 조선학교에 모두 기부하고 9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현대사적 재조명

이화림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의 탄압과 전쟁 속에서도 끝까지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헌신한 여성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과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잊혀 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공산주의자였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한국 전쟁에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와 김구 선생 등의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를 어렵게 하였고, 그녀를 반역자로 몰아세웠습니다.

 

그러나 이화림 선생은 자신이 믿는 이념과 신념을 위해 살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유언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는 조선인으로 태어나 조선인으로 죽는다. 나는 조선인으로서 한국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중국인으로서 중국 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나는 한국과 중국이 친밀하게 협력하여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

 

이화림 선생은 현대사적 재조명을 통해 우리가 존경하고 배울 점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도 용감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의사로서 많은 부상자와 환자들을 치료하였으며, 교육자로서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녀는 국경과 국적을 초월하여 인류의 해방과 평화를 위해 힘썼습니다. 그녀의 삶과 정신은 우리에게 조국은 무엇인지? 조죽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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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명철 선생의 활동 사항 요약

심영식(세례명: 심명철)은 한국의 시각장애인 전도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에 어윤희, 신관빈, 권애라 등과 개성 지역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받았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 감옥에 수감됐던 7인의 여성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며 사후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장애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이번 글에서는 장애인 독립운동가인 심명철 선생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고자 합니다.

1.심명철 선생은 누구인가

심명철 지사는 1896년에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심영식이고 심명철은 세례명입니다. 심명철 선생은 어린 시절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결혼 후 아들이 9살이 되던 해에 남편 문수화마저 사망하여, 평생 삯바느질로 앞을 보지 못하는 몸으로 홀로 남매를 키웠습니다. 이렇게 힘든 개인적 삶에도 불구하고 심명철 지사는 나라와 민족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2.심명철 선생의 항일운동

심명철 지사는 개성의 호수돈 여학교 졸업생이었고, 당시 호수돈 중학교 학생들의 결기는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10권은 ‘여자 만에 의해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던 곳이 적지 않았다. 3월 3일 개성에서 있었던 만세시위는 권애라, 어윤희 등에 의하여 호수돈 여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됐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심명철 지사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여성이라는 것, 더군다나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명철 선생은 개성의 독립운동가들과 개성 호수돈 여학교, 미리니 흠 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1919년 3월 3일 개성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당시 22살의 나이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을 구형 받은 심명철 지사는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어윤희, 신관빈, 권애라 지사와 함께 투옥되었다. 이들이 투옥된 옥사는 서대문 형무소여 옥사 8호 감옥으로 유관순 열사가 투옥된 옥사이다. 이 8호 옥사에 투옥된 7인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각종 영화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심명철 지사는 “장애인이 무슨 독립만세운동을 하느냐"라는 추궁에 “내 눈이 멀었다고 내 마음도 먼 줄 아느냐!"라며 당당하게 맞섰다고 합니다.

흔히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라고 하는데 몸이 조금 불편할 뿐, 그 의지와 정신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할 수 있음을 심명철 지사는 독립운동을 통해 보여주었다.

 

투옥 중인 1920년 3월 1일 서대문 감옥여 옥사 8호 감옥에서 유관순·임명에 등과 옥중 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 이때 고문으로 고막을 다쳐 평생 고생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유관순 등과 감옥에서 불렀다는 '대한이 살았다'라는 노래가 아들(문수일)을 통해 2019년 언론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이 노래를 통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힘찬 기상과 용기를 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3. 광복 후 활동

광복 후, 심명철 선생은 시각 장애인 단체를 설립하여 시각 장애인 복지 및 자활에 대해 많은 일들을 하셨고 그들의 자활과 자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983년 세상을 떠난 심명철 선생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하였습니다.

심명철 선생은 장애에 좌절하지 말고 자기 본분을 행하라고, 후손인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는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까지 관심이 있든 없든 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남겨주신 이름 없는 수많은 분들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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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선생 활동 사항 요약

본관은 밀양. 아버지는 박용환(朴容翰)이고, 어머니는 김맹련(金孟蓮)이다. 아버지 박용호 한은 순종 때에 탁지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 기사였으며, 일제의 무단 통치에 비분강개(悲憤慷慨) 하여 1918년 1월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어머니 김맹련은 기장 출신의 항일 운동가 김두봉(金枓奉)과 사촌이고, 김약수(金若水)[김 두자]와 육촌 형제이다. 형제자매는 박문희(朴文熺)·박문호·박문하·박수정이다. 오빠 박문희는 신간회에서 활동하였고, 박문호는 의열단에서 활동하였다. 항일 운동의 과정에서 박철에, 임철에(林哲愛), 임청산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1. 박 차정 선생의 출생과 가족관계

박차정 선생님은 1910년 5월 7일 부산에서 3남 2녀의 넷째로 출생아 났습니다. 측량 기사였던 아버지 박한용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비분강개 항거 하여 자결했고, 어머니 김맹련는 김두봉 선생과 사촌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민족의식이 강한 집안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동래 일신여학교에서 근우회 사건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과 조선혁명군사 정치 간부학교에서 활동하였습니다

 

2. 동래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

조선 소년 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한 박차정의 항일의식은 1925년 동래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면서 더욱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일신여학교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학교였으나, 민족정신의 함양을 중요시하여 조선어, 역사, 지리 등의 교과에 중점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민족 운동가를 배출해냈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부산지역 만세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학교에 입학하게 되니 가정에서 키워온 박차정의 항일의식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박차정은 우리 민족의 비극을 말하면서, 이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독립이고 애국지사들이 벌이고 있는 독립운동에 모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차정은 항상 일신여학교 동맹 휴학의 주모자로 활동하였다.

근우회 중앙 집행 위원회 중앙 상무위원으로 선출

근우회는 민족협동전선으로 만들어진 신간회 창립에 즈음하여 조선 YWCA와 조선 여성 동우회 등 민족주의계와 종교계, 사회주의계의 여성운동 가이 참여해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내걸고 1927년 5월 출범한 여성운동의 총본부입니다.

근우회는 창립 이후 전국에 지회를 조직하는 한편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야학의 설립과 강연회 등을 통해 문맹 퇴치와 여성계몽에 주력했는데, 1928년 7월 임시전국 대회를 계기로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는 이념 중심의 활동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0년 이후 활동이 눈에 띄게 침체되어 신간회 해소론의 대두와 더불어 1931년 해소의 길을 걸었다. 해소될 때까지 국내·외에 70여 개의 지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펼쳤다.

박차정 활동 기반이었던 동래지회는 1928년 5월 10일에 결성되었으며, 사회주의 계가 결성한 지회였다. 동래지회는 확실한 이념을 갖고 운동을 전개하였던 지회로서 중앙회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박차정을 중심으로 동래지회에서 청년운동과 여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3. 근우회 사건 배후 지도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출판과 선전을 맡았던 박차정은 근우회의 핵심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이때 근우회는 1929년 광주 항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 시위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근우회 사건으로 박차정과 근우회의 허정숙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 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라고 결의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박차정은 처음에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일시 석방되었지만 1930년 2월 고향인 동래에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세 차례의 심문 후 2월 15일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고, 2월 20일에는 서대문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기소가 성립된다는 의견서가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2월 28일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로 처리되었다.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난 박차도 정은 모진 고문으로 몸이 상하여 한 달간 꼬박 누워서 치료를 받았다.

 

4. 중국 망명과 결혼

1930년, 박차정은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베이징에서 박차정은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던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설 동맹 중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3월 김원봉과 결혼한 후에는 남편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이 되어 활약하였습니다.

 

5. 중국에서의 항일운동

1932년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여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 정치 간부학교 개설을 준비하였다.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와 제휴하여 혁명 간부학교를 개설키로 하여 본격적으로 학생을 모집하였다. 조선혁명군사 정치 간부학교의 개설에 앞장섰던 박차도 정은 개교 후 여자부의 교관으로 여성의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박차도 정은 임철애(林哲愛)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졌으며 일본 측의 자료에도 이 이름이 더 많이 나온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박차정은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박차정은 1936년 7월 16일에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을 과 함께 민혁당 남경 조선 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전체 민족해방운동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민족혁명당이 창립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은 한중 연합전선의 형식을 빌려 항일 무력 조직으로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였다. 김원봉이 주도한 초기 의용대는 조선민족 입장에서 중국 항전 참가․일제 타도․조국해방의 임무를 자임하고 창설되었고 그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선 공작 ․ 적후 공작 ․ 동북 진출 세 가지를 설정하였다.

박차정은 22명으로 구성된 부녀 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당시 의용대 본부에는 최종선을 단장으로 하는 3․1소년단이 있었다. 여자도 훈련소에서 1개월의 훈련을 마친 후 의용대 대원으로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의용대 내에는 여자 대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박차정은 여성대원들의 선봉에서 싸웠다.

1939년 2월 박차도 정은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6. 박 차장 선생의 마지막 삶

박차정은 김원봉이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했던 즈음인 44년 5월 27일에 곤륜산 전투에서 당한 부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박차정은 병상에 있으면서도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완수하는데 참여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셨다고 전해져 옵니다. 어려서부터 민족 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 항일투쟁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박차정은 꿈에도 그리던 민족의 해방을 1년 앞두고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광복 후 귀국한 김원봉은 부인 박차지의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 감전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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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선생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였습니다.

 

오늘은 잠시 시간을 내어 여성 의병 지도자로 활약하신 윤희순 선생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출생과 가족관계:

윤희순 선생은 1860년 6월 25일 경기도 양주군 구지면 (현 구리시)에서 윤이상 (尹翼商)과 덕수 장 씨의 큰딸로 태어났습니다. 유학자 집안에서 나고 자란 윤희순은 16세 되던 1876년 춘천 의병장 외당 (畏堂) 이홍석 (柳弘錫)의 장남이며 팔도 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인 유재원 (柳濟遠)과 결혼하였고, 시아버지 유황석의 영향으로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습니다.

 

2. 항일운동:

일제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896년 단발령을 발표할 무렵 ‘안사람 의병과’등 여러 노래를 지어 항일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여성들도 구국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였습니다.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의사는 군자금을 모아 가정리 여의 내골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였습니다.

또한 여자의 병 30여 명을 모집하여 다른 의병을 뒷바라지하거나 의병 훈련에 참여하였습니다. 비록 직접 의병 전투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후방에서 그들을 적극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남장으로 변장하여 첩보 수집 활동에도 기여하였습니다.

특히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밀고자를 꾸짖었고, 그런 가운데 안사람 의병 가를 작곡하고, 8편의 의병노래와 일제에 보내는 경고문을 남겼습니다, 이는 최초의 한글 의병 가이자 민족 저항 시가입니다.

 

3. 윤희순 성생의 구국 운동 활동 촉구

윤희순 선생은 많은 여성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도록 ‘안사람 의병과’, ‘안사람 의병노래’ 등을 지어 여성들도 구국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의병을 진압하는 관군에게는

“우리나라 좀 벌레 같은 놈들아,

어디 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나 쫓는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 하니 내 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 마라 우리 의병들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관군을 좀으로 취급하였다.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밀고자들에게도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인고,

너희들은 무슨 일로 그다지도 모르는가”라며 힐책했다.

 

청년들에게는 “우리 조선 청년들아, 의병 하러 나가보세,

의병 하여 나라 찾자, 조선의 기 청년들아, 빨리 나와 의병 하여 보세,

아낙네들 나와 의병을 돕는 데 하물며 우리 청년들아 나라 잃고 가만히 있을쏘냐,

너도 나가고 나도 나가자”라며 구국 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4. 중국으로 망명, 나 학당을 설립하여 항일 인재 양성에 나서다.

윤희순 선생은 1911년 시아버지 유홍 석괴 남편 유지에 원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1912년 초 환은 현으로 이주하여 수전을 개발하여 벼농사를 짓고 군자금을 모아서 인재를 양성하려고 노학당 (勞學堂)을 창립하였습니다, 김경도 및 박종수를 비롯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양성하였으며, 아울러 중국인과 한국인에게 항일 애국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이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5. 조선 독립단 조직

1913년 시아버지 유황 석이, 1915년에는 남편 유재원마저 세상을 떠나고. 노학당까지 폐교당한 이곳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었던 선생은 1915년 막내아들 교상을 데리고 환은 현을 떠나 무순 포가 돈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선생은 조선 독립 단과 조선 독립단 가족 부대를 조직하고, 조선 독립단 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 독립단은 선생의 뒷받침하게 아들 유동상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선생과 유동상은 항일 선전을 강화하여 중국인들을 각성시켜 연합 투쟁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조선 독립단을 한중 연합으로 조직하였다.

 

1930년대 초 선생은 요령성 동고촌 뒷산 밑으로 이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과 앞잡이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에 불을 질렀다. 모든 살림과, 서적, 사당이 불타버렸다. 이 사건으로 조선 독립 단원들은 산속에 숨어 지냈으며, 여자 가족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선생은 석방된 후 중국인의 주선으로 작은 집을 얻어 지냈다.

 

선생은 중국인의 집과 친척 집을 돌며 피신을 하면서도 항일 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집에 돌아오던 중 1935년 8월 1일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현대사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9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로,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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