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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신 선생은 임신 중인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아이를 낳은 지 12일 만에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그 아이는 시력을 잃었고........,

안경신 선생은 출소한 후 그 행방이 알려진 바가 없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을 추서했으나, 후손이나 가족이 없어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안경신 선생은

안경신 선생은 1888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본명은 안영실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를 2년 다니셨으나 중퇴하셨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군중을 선동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29일간 구류되셨습니다.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그 이후 선생께서는 오신도와 안정석과 함께 1919년 11월에 평양에서 여성 독립단체인 대한 애국 부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대한 애국 부인회는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각 지부에서 만세운동, 투탄, 암살 등의 공격 활동을 펼쳐 일제의 통치를 저항하였습니다. 안경신 선생은 본부의 교통부원이었으며, 강서지회의 재무도 담당하였습니다.

상하이로 건너간 안경신 선생

안경신 선생은 임시정부의 비밀 요원이었던 김행일과 함께 1920년 상해로 건너가셨습니다.

그 해 미국 의원단이 한국에 오자,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 광복군 총영에 가입하셨습니다. 총영은 일제의 통치기관과 우두머리들을 폭탄과 암살로 공격하는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폭탄을 던지다

안경신 선생은 임신 5개월 된 상태에서도 총영의 동지들과 함께 평안남도 안주에서 경찰 1명을 쏘아 죽이고,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에 참여하셨습니다.

이때 그녀는 폭탄을 들고 달리다가 넘어져서 부상을 입었으나,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셨습니다.

“나는 3․1만 세 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곧 폭탄을 던지거나 칼로 찔러 죽이거나 총으로 사살하는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요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이는 102년 전인 1920년 8월 3일에 하신 말씀입니다

 

 

안경신이 체포된 것은 도피생활 7개월째인 이듬해 1921년 3월 20일. 피신처에서 아기를 낳은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품에는 태어난 지 12일 정도 된 핏덩이가 안겨 있었다. (…)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남자현 의사처럼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이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폭탄 투척 거사와 같은, 남성의 열사들도 함부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에 나선 여성 투사는 안경신이 유일하다. 거사 직후 언론은 그를 두고 '여자 폭탄 법'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의 동지 최매지는 이렇게 증언했다.

 

"독립투쟁가가 많이 있고 여성 투쟁가도 수없이 있다. 그러나 안경신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멸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 - <조선의 딸, 총을 들다>에서.

1920년 8월 당시, 미국 상하 의원단 100여 명이 동양 시찰차 중국에 들러 일본으로 가는 길에 조선(한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정보를 입수한 대한 광복군 총영은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총영 소속 10여 명의 청년들로 결사대를 꾸려 서울과 평양, 신의주의 경찰서 등을 폭파하는 거 사를 계획한다.

 

33세의 안경신은 유일한 여성 대원이었다. 게다가 임신한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안경신이 속한 제2 대 2조의 평양 경찰서 폭파는 폭탄의 불발로 실패하고 만다. 이에 다른 대원들은 황해도로 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를 시도한다. 그러나 안경신은 임신한 몸이라 동행하지 못하고 혼자 남아 폭파 기회를 노리다가 한층 강화된 감시와 경비로 뜻이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출산한 지 보름도 되지 않은 몸으로 체포되고 만 것이다. 도피 7개월째였다.

 

안경신 선생의 이야기는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출생 직후 감옥에서 함께 지낸 아들은 감옥에서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해 시각장애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출옥 후 안경신 선생의 행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핏덩이를 안고 형무소로 끌려간 그가 출옥한 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그의 남편이나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은 또 어떻게 되었는지 등,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은 1962년 건국 공로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나 선생의 친지나 가족 등이 없어 아직까지 전달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지만 현실에서는 당대의 대가 끊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 다만 국민에게 나라를 남겼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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